버냉키 의장 입지 급속 약화
양적완화 불구 달러가치 강세
美경제 '잃어버린 10년' 우려
앞으로 글로벌 증시 흐름을 읽기 위해서는 변하고 있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입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았던 버냉키 의장이 최근 들어서는 그 위상에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 의회 내에서 입지가 예전만 못하다. 올 7월부터 추진된 단일 금융개협법에서 의회가 FRB를 견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상황에서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의 입김이 대폭 강화됐다. 이 때문에 중간선거 이후 열리는 의회 청문회에선 버냉키 의장이 추진해 온 통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시장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버냉키 의장이 주력하고 있는 양적완화 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시장금리가 하락해야 한다. 그래야 대내적으로 총수요가 늘고 대외적으로 달러 약세로 수출이 증가하면서 경기가 회복돼 최대 현안인 쌍둥이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의 각종 시장금리는 상승세다. 이달 3일 결정된 2차 양적완화 정책에 따라 국채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채권금리가 오르고 달러가치가 강세로 돌아서고 있는 점이 버냉키 의장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시장금리가 오르면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환율분쟁 해결책으로 경상수지관리제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지만 신흥국들에 자본유출입을 규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미국 등의 양적완화로 과도하게 외국자본이 들어올 경우 신흥국들은 자국의 경제 안정을 위해 토빈세 등을 합법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외국자본이 규제에 민감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들어 버냉키 의장의 입지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면서 미국 경제가 앞으로 일본 경제처럼 '5대 함정'에 빠져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것이란 시각이 대두되고 있어 주목된다. 5대 함정은 먼저 정부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policy trap)'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부양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책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와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져 있는 점도 동일한 맥락이다.
어떤 나라든 이런 상황에 놓이면 국민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은 증대된다. 그 결과 예측기관들은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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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미명하에 개혁과 구조조정을 10년 넘게 외쳐왔으나 경제구조를 개선하는 데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정책과 국민들의 불신 간 악순환만 반복됐다. 이 때문에 전망 기관들이 1990년대에 전망치를 가장 많이 수정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미국은 지난해 6월 이후 회복세를 보이던 경기가 하반기 들어 주춤거리고 있다. 중간선거 결과가 입증해 주듯 오바마 정부와 FRB 정책에 대한 믿음은 크게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는 이미 '제로' 수준으로 하락했고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려 3차,4차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한다 해도 경기 회복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것이란 시각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대형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구조조정 성과가 나타나고 있으나 여전히 잠재 부실을 안고 있다. 이미 나라살림과 국민들의 빚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이 때문에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하고 예측기관들도 직전 전망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전망치를 내놓기에 바쁘다.
아직까지 '우려' 단계라 하지만 미국 경제가 최근 들어 5대 함정에 빠져드는 징후가 뚜렷하다. 오바마 정부와 FRB가 얼마나 빨리 이런 징후를 차단해 나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투자자들은 당분간 버냉키 의장 입지와 미국 경제 최근 변화를 예의주시해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다.